신문기자 출신
박신규 회장
6.25가 한창이던 1951년, 창업주 박신규 회장은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전쟁으로 중앙 언론들의 신문 발행이 여의치 않았던 시절, 대구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최연소 사회부장의 타이틀을 얻었으며, 편집국 수석부장의 자리에까지 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독자들에게 진실 전달과 청렴함이라는 나름의 소신을 굳게 지켜오던 박신규 회장은 어느 날 신문사를 나와 사업가로 변모하며 인생 제 2막을 열었습니다.
박종욱 대표이사는 아버지 박신규 회장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언론계에 같이 계셨던 주변분들 말씀으로는, 기자 시절 아버님 별명은 ‘면도날’이었다고 해요. 비판적인 기사에 정치적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데스크와 자주 마찰을 빚기도 하는 등 기질이 매우 강하셨던 모양입니다. 또 다들 힘들던 시절이라 주변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많다보니 박봉이었던 월급이나마 언제나 반쪽만 집에 가져오셨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아버님도 신문기자로 소신을 지키면서 노모와 여러 자식들을 건사하기 어렵다고 판단해서 사업으로 눈을 돌리셨던 것 같아요.”
욕실용품 제조업에 뛰어들다
1967년, 신문사를 나온 박신규 회장은 섬유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침구류에 들어가는 화학 캐시미론(명주나 목화 솜의 단점을 보완한 화학 솜)을 만드는 기계를 가지고 있던 한 친구의 제안으로 이뤄진 일입니다. 소자본으로 시작한 만큼 작은 회사였지만 시황을 잘 만났고 부지런히 일한 덕분에 회사다운 모습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1973년 평소 가깝게 지내던 지인이었던 도기공장 대표가 세상을 떠나면서 박신규 회장에게 어려운 상황에 놓여진 회사 경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정상화 될 때까지 경영을 맡기로 한 것이 욕실용품 제조업과 인연을 맺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지분을 투자했던 수도꼭지 제조 회사인 로얄금속기업사를 인수하게 되면서 지금의 로얄&컴퍼니가 시작되게 됩니다.
건전한 사고와 배려의 경영으로 성장을 이끌다
박신규 회장은 사업을 하면서도 기자 시절부터 가졌던 기질이나 신념은 바꾸지 않았습니다. 박종욱 대표이사가 연수를 마치고 평사원으로 회사에 들어온 첫날 점심 무렵, 박신규 회장은 아들을 앉혀두고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돈 더 많이 번다고, 매끼 송아지 한 마리씩을 잡아 먹고 살 것 아니지? 우리는 사업 하면서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면서 살자.” 그리고 또, “네가 여유가 있어서 스테이크를 먹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라면 겨우 먹은 사람 앞에서 점심에 먹은 스테이크가 맛있었느니 없었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면 그 순간부터 너는 죄를 짓는 거야.”
이에 대해 박종욱 대표이사는 “그 당시 소고기 값이 비싸긴 했던 모양입니다. 회장님이 예로 든 두 이야기 소재가 모두 소고기였던 걸 보니까요(웃음). 그 당시에는 제가 어려서 그렇게까지 무겁게 받아들이진 못했지만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경영의 목적과 사람에 대한 배려를 염두에 둔 이 두 가지 얘기는 이후에도 줄곧 로얄을 지탱하는 기업 철학과 문화의 근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경제가 한창 고도성장을 하던 시기와 맞물리면서 로얄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Royal
로얄이 걸어 온 길,
로얄과 더불어 온 길,